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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2019년

다해 연중 제 23주일

F.Correa 2019. 9. 8. 16:44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3 가지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입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구절들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국 순교자들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 공동체는 한자를 아는 지식인층이나 지배계층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한국 초기 교회는 다른 나라와 다르게 선교사를 통해서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학문인 서학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자생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교 사상으로 지배되던 조선 사회에서 윤지충 바오로가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1791 년 신해박해가 발발하고, 그 후 100년 1866년 병인박해가 끝날 때까지 교회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때 교회엔 신앙을 저버리는 배교자가 나왔으며, 다른 한 편에서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신앙을 버리라는 가족들의 회유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순교하는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100 년간 이어진 박해는 다양한 이유로 일어났습니다. 정치적 정적을 없애기 위해 박해가 일어난 적도 있고, 천주교인들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금씩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 안에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은 제 2 독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느 사람이 천민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를 사회처럼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로 대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014 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시복된 황일광 시몬의 일화를 살펴보면 이를 보다 더 분명하게 잘 알 수 있습니다. 황일광 시몬은 천민 출신입니다. 당시에 사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천시와 멸시를 당했지만, 교우들은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고, 양반들은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그를 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농담조로 나의 이러한 신분에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체험들이 쌓여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사회 안에서 증명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따랐으며, 자신의 재산이 모두 몰수당할 수 있음에도 그리스도를 믿었고, 자신의 친지나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음에도, 그들로부터 갖은 모욕과 무시, 미움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지녔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 일들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었는지 우리가 깨닫는다면 쉽게 그들이 행한 일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지상에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지상에 있었으나, 그들의 영혼은 천상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는 믿었고, 이 지상에서 체험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처럼 행동한다면, 우리 또한 그들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지닌다면, 우리 삶 속에서 오늘 복음 말씀과 독서 말씀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믿음은 저절로 우리에게 오지 않으며, 우리 안에서 자라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며, 하느님과의 수많은 대화 속에서 자라납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지니기 위해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 하느님과 대화하는 시간, 바로 기도 시간을 우리 일상에서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을 깊어지고 단단해지며, 비록 이 시대에 우리 모두 순교할 수 없지만, 순교자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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