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제 1독서는 예레미야서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신다면 예레미야서가 전반적으로 암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자주 이야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의 상황에 안주하며,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를 거짓 예언자라고 몰아세기도 합니다. 오늘 제 1독서의 내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도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으로 죽겠지만, 칼데아인들에게 나가 항복하는 자는 죽지 않고 제 목숨을 전리품으로 얻어 살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이 바빌론 임금의 군대에 넘어갈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매국노와 같은 존재로,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존재로 받아들립니다. 사람들은 바른말을 하는 예레미야를 박해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말키아 왕자의 저수 동굴에 가두어 놓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느님이라는 정의를 전하기 위해 고통받고 박해받는 예레미야를 볼 수 있으며, 정의를 위해 박해를 받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맡은 임무를 완성하는 예레미야를 볼 수 있습니다.
제 2독서는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가 언제 정확하게 써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60년에서 95년 사이에 써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박해가 일어납니다. 하느님 이외에는 다른 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기억하면서 오늘 제 2독서의 부분을 다시 읽으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지금 당장 시련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결국에 승리하신 것처럼, 이러한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지금의 시련은 인내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끝까지 그리스도를 믿자는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 말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평화를 사랑할 것 같고, 이러한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실 것 같은 분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되돌아보면, 이 말씀과 다르지 않게 살아오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과거의 관습대로 살아왔습니다. 어느 순간이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본질을 보지 못한 체 형식적으로만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이 부분을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를 배척하고, 그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참된 하느님의 길을 걷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내쫓을 때 사람들과의 갈등이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변화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과거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지금 상황에 안주하지 말고, 참된 진리를 향해 나아가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러나 그 일은 많은 반대에 부딪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길을 걸어 나아가십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를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당하게 되는 시련과 박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꿋꿋이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들의 삶은 하느님 때문에 편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내적 투쟁 속에 살아가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리 법칙 중에 뉴턴의 제 1법칙인 관성이 있습니다. 관성이란 운동하고 있는 상태의 물체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입니다. 우리 삶에도 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오던 습관대로 살아가는 마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안주하려는 마음이 더 큽니다. 나에게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 있음에도 그것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묵인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삶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다가오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이치대로 이야기하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치대로 이야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그분의 말씀이 불편하게 들리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 삶에 받아들이기가 어렵기도 합니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이 세상의 이치와 비교했을 때, 너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분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 세상의 이치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이 넘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과거보다 더 많은 고민과 갈등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나약한 존재이기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하느님의 것보다는 세상의 것을 선택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고, 유혹에 빠져 나 자신과 타협해서 세상의 것을 쫒아갈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선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 우리를 두는 것입니다. 비록 구원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확실하게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는 날까지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로마 8,25) 우리가 하느님께 희망을 둔다면 우리는 결코 약해지지 않을 것입니다.(1마카 2,61)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쁨 속에서 이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고 완수할 것입니다.
'강론 > 2019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해 연중 제 23주일 (0) | 2019.09.08 |
---|---|
다해 연중 제 22주일 (0) | 2019.08.31 |
다해 성모 승천 대축일 (0) | 2019.08.14 |
다해 성모 승천 대축일 전야 (0) | 2019.08.14 |
다해 연중 제 19주일 (0) | 2019.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