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각자는 각기 다른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하느님을 굉장히 무서운 분으로 인식할 수 있고, 또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 그 자체이신 분으로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다른 것처럼, 우리 각자가 살아왔던 삶을 통해 체험되는 하느님 또한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하느님은 신부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하고 물어본다면, 저는 주저없이 나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는 분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와 있듯이 그리고 저의 삶을 되돌아봤을 때, 하느님께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꾸짖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인간을 용서하시며, 인간을 당신 곁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에서 저는 인자하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게 먼저일까요? 아니면 사랑받는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이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저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사랑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가장 먼저 우리는 하느님의 이 세상 창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만드셨다고 가르치며, 비록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 죄를 입은 인간이 되었고, 하느님께 끊임없이 죄를 짓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보호하시며,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그에게 보내셔서 당신 곁으로 다시 불러 모으길 원하셨습니..
우리는 교회는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4번의 큰 박해와 작은 여러 박해로 만 여명의 분들이 순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목숨으로 증거하신 분들 중에서 오늘날 우리는 1984년 지금의 여의도공원, 당시엔 여의도 광장에서 육십만명의 사람이 운집한 가운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집전으로 성인품에 오르신 103위 순교 성인들과 2014년 광화문 광장에서 백만명의 사람이 운집한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복자품에 오르신 125위 순교 복자들만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목숨을 잃으신 분들을 성인으로 그리고 복자로 기려야 함에도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든 분들을 성인으로, 복자로 추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헌문헌이나 교회문헌을 통해서 순교가 확실히 확인된 분들만을 성인으로, 복자로 ..
오늘 복음은 회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라틴어로 conversio라고 합니다. con은 영어의 무엇과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 with를 뜻하기도 하고, 완전한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versio의 원형은 versus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회전 혹은 돌아섬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합치면, 회개라는 라틴어 단어는 완전히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상상을 해보면, 이 단어의 느낌은 자동차의 유턴 같은 느낌입니다. 유턴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왔던 길과는 반대로 가기 위해 차를 돌리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회개라는 라틴어 단어는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고, 하느님과 반대되는 방향, 죄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았다..
추석을 되새겨보면, 저는 20살 이후론 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20살 이후론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추석을 추억하면 추억이라곤 기숙사에 살다가 방학이라고 집에 갔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추석을 추억하면, 어린 시절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추석이 되면, 친척집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저는 친척집에 가면 삼삼오오 모여서 놀기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풍겨오는 기름 냄새에 저도 모르게 발이 전을 부치는 곳으로 이끌려 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전을 부치던 어머니는 자기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서 놀라고 핀잔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전 그 핀잔에 굴하지 않고, 옆에 바짝 붙어 어머니가 전을 부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다 부쳐 놓은 전 먹어도 되냐고 조르기도 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