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2019년

다해 연중 제 14주일

F.Correa 2019. 7. 5. 11:33

오늘 말씀의 전례를 보면,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라는 단어는 제 1독서 이사야서 66장 12절,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제 2독서 갈라티아서 6장 16절, “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오늘의 복음, 루카 복음 10장 5절에서 6절,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는 구절에 나옵니다. 

 

이사야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서 중 한 권이고,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였기 때문에 이사야서에 나오는 평화라는 단어는 당연히 히브리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서로 나눌 때 부르는 노래에서 많이 들었던 단어입니다. 바로 샬롬입니다. 샬롬은 우리 모두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평화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인사말로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성경에서도 즐겨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완전하게 하다, 완성시키다”, “갚다, 지불하다, 보상하다”라는 뜻을 지닌 샬렘이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샬롬이라는 단어는 평화와 인사말 이외에도 완전함, 건강함, 웰빙, 조화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완전하게 되어야 할 것인가? 이것을 살펴보는 것이 구약에서 의미하는 평화를 보다 더 쉽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과거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고, 그 다음은 이웃입니다. 마태오 복음 22장 37절에서 40절의 말씀을 살펴보면, 분명해집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과 레위기 19장 18절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율법학자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생각해보아도 마찬가지 잆니다. 십계명도 분명하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완전해져야 하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평화, 샬롬은 하느님과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더욱 분명하게 그 의미가 들어납니다. 

 

이 단어는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70인역에서 에이레네로 번역이 됩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총 92번 등장하며 요한 일서를 제외한 모든 책에서 발견이 되며, 오늘 우리가 봉독한 루카 복음엔 총 16번 사용됩니다. 이 단어의 어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묶다, 혹은 연결하다, 하나가 되도록 결합시키다와 같은 뜻을 지닌 에이로라는 동사입니다. 서로 두 가지의 것이 완전하게 하나가 된 상태를 에이레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국가가 다른 한 국가를 이겨서 하나가 된 상태를 그래서 평온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가리키거나 혹은 서로 동등한 상태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 휴전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 이 단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조화를 이룬 상태, 화합을 나타내기도 하고, 싸우고 있는 상태에서는 화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성경에서 사용된 샬롬과는 그 느낌이 다릅니다. 샬롬은 관계 지향적이었다면, 에이레네는 평화로운 상태 그 자체를 가르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평화의 개념을 정리해 보면, 세 가지 측면에서 평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일반적으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의미로, 한 국가와 다른 국가 간에 전쟁이 없는 상태, 둘째, 사람과 사람이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상태, 셋째,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완전해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점들은 사실 하나의 지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죄 이전의 상태로의 회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 이전의 세상은 모든 것이 올바르게 질서지워져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둘의 관계를 망가트리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인간은 그 어떤 어려움도 없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관계 안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도 없었며, 그 어떤 갈등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는 일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없었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 속에 머무르고, 다른 사람들과의 완전한 조화와 일치 속에 살아가며, 모든 것이 완전한 상태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원죄로 인해 우리 안에 이 모든 것들이 생겨났고,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참되고 하나이며 아름답습니다. 진리 안에는 진리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온전히 머문다면 그 어떤 유혹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고, 그 안에서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는 고요하고 평화롭고 평온한 상태에 머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바로 그 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14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누군가는 강력한 힘에 의해 평화가 유지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진정 강한 힘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하십시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가 우리 안에 옵니다. 그리고 201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레이마 그보위의 한국어판 책 제목처럼 평화는 스스로 오지 않습니다. 평화에 이를 때까지 숱한 어려움이 있고, 수많은 투쟁이 존재합니다. 이 어려움과 투쟁을 이겨낼 때, 진정한 평화가 우리 안에 옵니다. 이것들을 이겨낼 힘을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 풍성하게 머물게 될 것입니다.